대가야의 건국신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9의 고령현 건치연혁조에 나오는데 (본문생략)
시조는 이진아시왕(伊珍阿?王)인데【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 그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대략 16세 520년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석리정전(釋利貞傳)을 살펴보면,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라고 되어 있으니, 뇌질주일은 곧 이진아시왕의 다른 이름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다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낙동강 중류의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고령세력이 가야의 여러 세력을 규합하여 새로이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이
때부터의 역사를 금관가야가 주도권을 잡았던 전기가야(前期加耶)와 구별하여 후기가야(後期加耶)라고 한다.
대가야는 이웃의 합천지역을 통합한
이후, 전성기에는 남해안의 일부와 아라가야의 영역을 제외한 함양, 남원, 임실, 섬진강유역에까지 영향력을 넓혀 당당히 후기가야의 맹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대가야의 영향 아래 들어간 지역은 문화적으로 하나의 권역을 이루고 있어 이를 대가야문화권(大加耶文化圈)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고령 지산동 32호출토 금동관 합천 저포리 E-4호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
"하부(下部)"라는 글씨를 통해, 대가야가 통합한 지역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편입시켰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서기 479년 대가야의 왕
하지(荷知)가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서기 522년에는 대가야와 신라의 왕족 사이에 결혼도 이루어졌다. "대왕(大王)"이라는
글씨를 새긴 토기라든가 맹주국 왕의 상징인 금관도 이 즈음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증거를 통해 대가야가 후기가야의 맹주로서 다른 가야들보다
한단계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집권국가(集權國家)로 다가서는 기틀을 다진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강대국으로 성장한 신라와 백제의 전쟁
틈바구니에 낀 대가야는 낙동강유역을 장악한 신라의 공격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서기 562년에 멸망하였다.
마지막 비운의 왕자 월광태자 (도설지왕으로 추정)는 신라에 의해 왕으로 추대 되지만 얼마후 신라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쫒겨나는 신세가 된다. 그는 현재 합천 가야땅에 절을 짖고 은둔하는데, 개울가에 월광정사라는 조그만 절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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